AI가 만든 첫 시안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AI가 만든 첫 시안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지난주 후배 디자이너의 화면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프롬프트 한 줄을 입력하자 깔끔한 대시보드 시안이 30초도 안 되어 화면을 채웠습니다. 폰트 위계도 정돈되어 있고, 컴포넌트 간격도 4의 배수로 맞아 있었습니다. 후배는 그 화면을 그대로 핸드오프 채널에 올렸습니다. 보기에는 완성된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사용자 테스트에서, 정작 사용자는 첫 번째 액션 버튼을 끝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화면은 매끄러웠는데, 동작은 거칠었습니다.

오늘은 그 어긋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AI가 시안을 만들어주는 속도에 도취된 사이, 우리가 잊고 있는 디자인의 가장 오래된 원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안은 완성이 아니라 가설이다

2025년 안드레이 카파시가 “vibe coding”이라는 표현을 처음 꺼낸 이후, 자연어로 묘사하고 AI가 만들어주는 결과물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흐름은 디자인 영역까지 빠르게 번졌습니다. UXPin의 2026 리포트에 따르면 AI가 레이아웃의 첫 80%를 만들어줄 때 디자인-프로토타입 사이클은 최대 8.6배 빨라졌고, 60%의 디자이너가 에이전트 UI가 올해 가장 큰 영향을 줄 트렌드라고 답했습니다.

문제는 속도가 만들어내는 착시입니다. 매끈한 표면 위에 정렬된 컴포넌트는 시안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그러나 NNGroup이 2026년에 발표한 연구는 이 착시를 정확히 짚어냅니다. 보고서의 제목 자체가 “Good from Afar, But Far from Good”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좋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좋지 않다는 뜻입니다. 연구자들은 AI 프로토타이핑 도구가 일반적인 지시는 잘 따르지만, 디자인 트레이드오프를 가늠하고 맥락에 맞게 조정하는 판단력은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패턴 매칭의 본성상 가장 흔한 해법으로 수렴하기 때문에, 결과물은 매끈하지만 그 화면이 풀어야 할 고유한 문제와는 어긋나기 쉽습니다.

디자인은 검증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명제

이 어긋남을 이해하려면 디자인이 본래 어떤 종류의 행위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널드 쇤은 1983년 저서 『The Reflective Practitioner』에서 디자인을 상황과의 대화라고 표현했습니다. 디자이너는 시안을 던지고, 시안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다시 수정합니다. 이 반복적 대화 없이는 디자인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습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이보다 더 일찍, 모든 가설은 반증되기 전까지만 유효하다고 말했습니다. 시안이 가설이라는 관점은 여기서 나옵니다. 시안이 매끈해 보인다는 것은 가설이 그럴듯해 보인다는 것일 뿐, 사용자가 실제로 그 가설대로 행동한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제이콥 닐슨이 발표한 휴리스틱 평가 방법론(닐슨과 몰리치, 1989-1990)이 지금도 살아남아 있는 이유도 같습니다. 시안은 검증의 대상이지 결론이 아닙니다. 닐슨은 한 인터뷰에서 사용성 테스트에서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테스트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좋은 디자이너는 자기 시안이 틀렸음을 빠르게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결함이 가장 위험합니다

vibe coding이 만든 결과물에서 가장 자주 누락되는 것은 시각적 정합성이 아니라 판단력입니다. NNGroup의 또 다른 2026 분석 “GenUI vs. Vibe Coding”은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생성된 컴포넌트가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그 자리에 그 요소가 있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디자인 실패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대시보드, 굳이 필요하지 않은 모달, 사용자의 흐름을 끊는 인터랙션이 매끈한 외형 안에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수치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Tenzai가 주요 AI 코딩 도구로 만든 15개 앱을 분석한 결과 69개의 취약점이 발견되었고, AI 생성 코드에 귀속된 CVE 등록 건수는 2026년 1월 6건에서 3월에는 35건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AI가 만든 결과물은 표준적인 케이스에서는 잘 작동하지만, 예측 가능성이 낮은 조건에서 자주 무너집니다. 이것은 보안의 문제이기 이전에 디자인의 문제입니다. 사용자가 정상 경로에서 벗어나는 순간, 시안에 없던 상태가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저도 이 함정을 직접 겪은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한 헬스케어 서비스의 메인 화면을 개편하면서, 초기 시안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정돈되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용자 피드백 세션을 거치면서 작은 변경을 누적했을 때, 시각적 매력에 대한 응답 점수가 약 30% 향상되었습니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그 변화의 대부분이 시안 단계에서는 보이지 않던 부분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빈 상태, 오류 상태, 데이터가 많을 때의 흐름. 첫 시안은 이 상태들을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AI가 만든 시안은 더 그렇습니다.

디자이너가 다시 들고 와야 하는 것들

그렇다면 디자이너의 역할은 어떻게 이동해야 할까요. 답은 새롭지 않습니다. 다만 우선순위가 바뀝니다. 생성 속도가 디자이너의 차별점이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차별점은 무엇이 만들어졌는지 검증하는 능력입니다.

내일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시안을 받자마자 다음 네 가지를 확인하는 습관입니다.

  1. 사용자 시나리오를 통과시키기. 시안 위에서 핵심 태스크 세 가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봅니다. 막히는 지점이 있다면 그 자리에 결함이 있습니다.
  2. 휴리스틱 평가 적용하기. 닐슨의 10가지 휴리스틱을 체크리스트로 옮겨놓고 시안을 한 항목씩 점검합니다. 특히 시스템 상태의 가시성, 에러 방지, 사용자 통제권은 AI 시안에서 가장 자주 누락됩니다.
  3. 5명에게 보여주기. 닐슨의 1993년 연구는 5명의 사용자만으로도 사용성 문제의 약 85%를 발견할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시안이 완성되어 보일수록 이 5명은 더 빨리 만나야 합니다.
  4. 엣지 케이스를 그려보기. 데이터가 없을 때, 너무 많을 때, 네트워크가 끊겼을 때, 권한이 없을 때. 이 네 가지 상태가 시안에 없다면 디자인은 아직 절반만 끝난 것입니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포인트는 이 검증을 디자이너 본인이 들고 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개발자나 PM이 검증의 책임을 가져가는 순간, 디자인의 시작과 끝 사이에 다른 사람의 판단이 끼어들게 됩니다. AI가 첫 시안을 만들어줄 수 있는 시대에 디자이너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은 검증과 의사결정의 권한입니다.

다시 사람에게 보여주는 일

좋은 디자인은 빨라서 좋은 것이 아니라 틀린 부분을 빨리 찾아내서 좋습니다. AI는 첫 시안을 만들어주는 가장 빠른 도구가 되었지만, 그 시안이 사용자에게 맞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도구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시안은 가설입니다. 가설은 사용자 앞에 놓일 때 비로소 디자인이 됩니다. 매끈한 표면을 받아들고 만족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AI 시대의 디자이너 여러분이 한 번 더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함께 더 나은 사용자 경험을 만들어 갑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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