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트를 만들다 보면 백로그라는 묘한 존재와 끊임없이 씨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정돈된 목록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수백 개의 항목이 쌓인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해관계자의 요청, 사용자 피드백, 경쟁사 분석에서 나온 아이디어, 기술 부채 항목까지. 백로그를 열 때마다 “이걸 언제 다 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순간, 이미 백로그는 생산성 도구가 아니라 심리적 부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려 합니다.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을 결정하는 기술에 대해서요.
비대한 백로그가 만드는 의사결정의 함정
백로그가 비대해지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의사결정의 품질입니다.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Baumeister)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에 내릴 수 있는 양질의 결정에 한계가 있습니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인지 자원이 소모되고, 결국 중요한 결정에서 직관이나 관성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사결정 피로(Decision Fatigue)입니다.
300개의 백로그 항목 앞에서 “다음 스프린트에 무엇을 넣을까”를 고민하는 PM의 상태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매번 전체 목록을 훑으며 비교하고,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이해관계자에게 “왜 이건 아직 안 되느냐”는 질문에 답합니다. 이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질문, 즉 “지금 우리 프로덕트에 가장 임팩트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쏟을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관점을 바꿔보겠습니다. 백로그가 크다는 것은 할 일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정하지 못한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빼기의 철학: Via Negativa와 기회 백로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저서 『안티프래질』에서 Via Negativa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라틴어로 ‘부정의 길’이라는 뜻으로,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을 통해 개선에 이르는 방법론입니다. 탈레브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무엇이 옳은지보다 훨씬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즉,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이 해야 할 것을 아는 것보다 더 강력한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철학을 백로그 관리에 적용하면 흥미로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까”를 먼저 결정하는 것입니다.
마티 케이건(Marty Cagan)은 SVPG에서 전통적인 백로그 우선순위 방식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가중치 점수표를 만들어 기능 요청을 순위 매기는 것은 PM의 본질적 역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그가 제안하는 것은 기회 백로그(Opportunity Backlog)입니다. 기능 목록이 아니라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백로그를 재구성하는 방식입니다. 기능이 아닌 기회를 단위로 삼으면, “이 기능을 만들까 말까”가 아니라 “이 문제가 지금 풀 만한 가치가 있는가”로 질문이 바뀝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상당수의 백로그 항목은 자연스럽게 탈락합니다.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의 투자 철학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진정한 비용은 실제 지출이 아니라 기회비용, 즉 그 자원을 다른 곳에 썼더라면 얻었을 가치”라고 말합니다. 매력적이지 않은 투자 기회 앞에서 현금을 들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버핏의 생산성입니다. PM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괜찮아 보이는 기능 앞에서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짜 우선순위 결정입니다.
스포티파이와 인터콤의 백로그 전략
스포티파이(Spotify)의 프로덕트 팀은 분기마다 백로그 선셋(Backlog Sunset) 세션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6개월 이상 착수되지 않은 항목은 자동으로 아카이브 대상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팀이 발견한 것은 흥미롭습니다. 아카이브된 항목 중 다시 살아 돌아오는 비율은 전체의 10% 미만이었습니다. 나머지 90%는 누구도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이 항목들은 애초에 “하면 좋겠다” 수준의 아이디어였지, “반드시 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인터콤(Intercom)의 공동 창업자 데스 트레이너(Des Traynor)는 더 과감한 접근을 취합니다. 그는 “대부분의 기능은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단언하며, 새로운 기능 요청이 들어올 때 다음 질문을 던집니다.
- 이 기능이 없어서 사용자가 떠나고 있는가?
- 이 기능이 우리의 핵심 가치 제안을 강화하는가?
- 이 기능을 만드는 동안 포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 질문 모두에 명확한 답이 없다면, 그 기능은 백로그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전략적 규율입니다. 인터콤은 이 원칙을 통해 제품의 복잡도를 낮추면서도 핵심 사용자 경험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명확합니다. 백로그를 줄이는 것이 제품의 방향성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실무에서 백로그를 정리하는 네 가지 방법
그렇다면 실제로 어떻게 백로그를 정리할 수 있을까요? 같이 한 단계씩 풀어보겠습니다.
첫째, 유통기한을 설정합니다. 백로그 항목에 90일의 유효기간을 부여합니다. 90일 안에 스프린트에 포함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아카이브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라면 다시 올라올 것이고, 올라오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그만큼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 기능이 아닌 문제로 기술합니다. “알림 설정 페이지 추가”가 아니라 “사용자가 불필요한 알림으로 인해 앱 사용을 중단하는 문제”로 기술합니다. 문제 중심으로 전환하면 여러 기능 요청이 하나의 문제로 수렴되고, 백로그는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셋째, 분기별 제로베이스 리뷰를 실시합니다. 기존 백로그를 백지 상태에서 다시 평가합니다. “이 항목을 오늘 처음 본다면, 백로그에 넣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관성적으로 유지되던 항목들이 이 질문 앞에서 걸러집니다.
넷째, 안 하는 것 목록을 공유합니다. 무엇을 하지 않기로 했는지, 그리고 왜 그 결정을 내렸는지를 팀과 이해관계자에게 투명하게 공유합니다. 이것은 “거절”이 아니라 “전략적 선택”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입니다. 안 하는 것 목록이 있을 때, 하는 것의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비우는 것이 채우는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생산성은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적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하는 데서 옵니다. 백로그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바쁘다는 증거가 아니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신호입니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가장 쓸모없는 일은,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일을 매우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PM의 진짜 역할은 백로그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팀이 가장 가치 있는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머지를 덜어내는 것입니다.
작은 실험 하나를 제안합니다. 다음 백로그 리파인먼트 세션에서, 항목을 추가하는 대신 삭제하는 시간을 먼저 가져보세요. 30분이면 충분합니다. 비운 만큼 팀의 시야가 맑아지는 것을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자료
- Baumeister, R. F., et al. (2018). “Decision Fatigue: A Conceptual Analysis.” Journal of Consumer Psychology.
- Taleb, N. N. (2012). 『안티프래질: 불확실성과 충격을 성장으로 바꾸는 힘』. Via Negativa 개념 소개.
- Cagan, M. “The Opportunity Backlog.” Silicon Valley Product Group (SVPG).
- Traynor, D. “Product Strategy Means Saying No.” Intercom Blog.
- Drucker, P. F. (1967). 『The Effective Executive』. Harper & 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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