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분기, 어느 기능 하나를 두고 며칠을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버튼의 마이크로카피를 다듬고, 진입 애니메이션의 곡선을 0.1초 단위로 조정하고, 사용자가 멈칫할 만한 지점을 찾아 흐름을 매끄럽게 깎았습니다. 그런데 출시 후 데이터를 열어보니, 그 기능을 가장 많이 호출한 주체는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외부 서비스에 연결된 자동화 흐름, 그리고 사용자를 대신해 작업을 수행하는 에이전트였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됐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위해 제품을 만들고 있는 걸까요.
우리의 사용자 정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PM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은 한 가지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사용자는 사람이다. 페르소나를 그릴 때 우리는 나이와 직업과 동기를 가진 인간을 떠올립니다. 사용자 리서치는 사람의 표정과 망설임을 관찰하고, 화면 설계는 사람의 시선 흐름과 인지 부하를 계산합니다. 이 전제는 너무 당연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전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트너는 2028년까지 조직의 80%가 자사 API를 개발자가 아니라 AI 에이전트가 더 많이 소비한다고 보고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또한 2028년이면 전체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의 약 3분의 1이 에이전트 기능을 내장하게 됩니다. 1년 전만 해도 1%에 불과했던 비율입니다. 사람이 직접 클릭하는 대신, 사람이 위임한 에이전트가 제품의 문을 두드리는 비중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생깁니다. 우리가 그토록 공들인 화면을, 정작 새로운 사용자는 보지 않습니다.
사용자에서 행위자로
관점을 바꿔보겠습니다. 이 변화를 이해하는 데 두 가지 오래된 이론이 의외로 정확한 렌즈가 되어줍니다.
첫째는 심리학자 제임스 깁슨이 제시하고 도널드 노먼이 디자인 영역으로 가져온 어포던스(“행위 가능성”) 개념입니다. 어포던스란 어떤 대상이 특정 행위자에게 “이렇게 다룰 수 있다”고 제공하는 단서입니다. 문손잡이의 모양이 사람에게 “당겨라”라고 말하듯이 말이죠. 핵심은 어포던스가 행위자에 상대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유효한 단서, 즉 색과 그림자와 애니메이션은 기계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에이전트에게 유효한 어포던스는 구조화된 데이터, 명확한 상태 값, 예측 가능한 응답 형식입니다. 사용자가 사람에서 기계로 바뀌면, 우리가 제공해야 할 단서의 종류 자체가 바뀝니다.
둘째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할 일 이론(“Jobs to be Done”)입니다. 사용자는 제품을 소유하려는 게 아니라 특정한 할 일을 해결하려고 제품을 고용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할 일을 누가 수행하는가. 점점 더 많은 경우, 사람은 할 일을 에이전트에게 위임하고 결과만 받아봅니다. 항공권을 비교하고 결제하는 노동을 사람이 직접 하지 않습니다. 제품을 고용하는 의사결정의 주체는 사람이지만, 실제로 제품을 다루는 손은 기계인 셈입니다.
이 두 렌즈를 합치면 새로운 설계 과제가 보입니다. 업계에서는 이를 에이전트 경험(“Agent Experience”)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디자이너 존 마에다는 2026년 보고서에서 “UX에서 AX로”라는 표현으로 이 전환을 요약했습니다. 사람이 보기 좋은 제품을 넘어, 기계가 명확하게 이해하고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제품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기계가 API의 다수가 되는 시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에이전트는 화면을 시각적으로 탐색하지 않습니다. 구조화된 인터페이스를 직접 호출하고, 그 응답을 해석해 다음 행동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에이전트에게 좋은 제품의 조건은 사람과 정반대입니다. 마케팅적 수사가 없을수록, 용어의 정의가 흔들리지 않을수록, 규칙이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사람을 설득하려고 넣은 모호한 표현이 기계에게는 그저 오류의 원인입니다.
이 흐름의 토대가 되는 것이 에이전트 간 표준 프로토콜입니다. 앤트로픽이 2024년 말 공개한 모델 컨텍스트 프로토콜(“MCP”)은 흔히 에이전트를 위한 HTTP에 비유되는데, 어떤 에이전트든 어떤 도구에든 표준 방식으로 연결되게 해줍니다. 출시 1년이 채 안 되어 월 9천만 건이 넘는 SDK 다운로드를 기록할 만큼 빠르게 자리잡았습니다. 제품이 에이전트에게 발견되고 연결되는 능력이, 곧 경쟁력의 한 축이 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실제로 저는 몇 년 전 여러 외부 플랫폼과 연동되는 통합 로그인 기능을 기획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외부 인증 API와 보안 프로토콜을 분석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썼지만, 솔직히 말하면 제 성취감은 늘 사람이 보는 화면을 잘 다듬었을 때 채워졌습니다. 기계가 읽는 연동 규격은 마지막에 문서로 정리하는 부차적인 일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뒷전으로 미뤄둔 그 인터페이스가 바로 지금 제품의 정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통째로 뒤집힌 셈입니다.
PM이 지금 준비해야 할 것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작은 것부터 같이 풀어보겠습니다.
| 기존 PM 관행 | 에이전트 시대의 전환 |
|---|---|
| 인간 페르소나 | 인간 페르소나 + 에이전트 행위자 정의 |
| 화면 중심 사용성 테스트 | 구조화된 인터페이스의 명확성·예측성 점검 |
| 사람의 전환 퍼널 추적 | 에이전트의 작업 성공·실패 신호 추적 |
| 매끄러운 카피와 설득 | 모호함 없는 정의와 일관된 응답 |
첫째, 두 종류의 사용자를 함께 정의하세요. 화면을 보는 사람과, 그를 대리해 제품을 다루는 에이전트를 동시에 사용자로 올려두는 것입니다. 둘째, 에이전트가 제품을 어떻게 발견하고,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결과를 확인하는지 그 여정을 직접 그려보세요. 사람의 사용자 여정 지도를 그리듯, 에이전트의 여정 지도가 필요합니다. 셋째, 성공의 신호를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체류 시간이나 클릭 같은 인간 중심 지표 대신, 에이전트가 작업을 끝까지 완수했는지, 어디서 실패하고 무엇을 오해했는지를 측정하세요. 넷째, 자율성에는 반드시 사람이 개입하는 경계를 설계해 두어야 합니다. 어디까지 에이전트에게 맡기고 어디서 사람의 확인을 받을지, 그 선을 긋는 것이 PM의 새로운 책임입니다.
결론
저는 사람을 위한 설계가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품을 고용하기로 결정하는 주체는 여전히 사람이고, 에이전트는 그 사람의 의도를 대리할 뿐입니다. 다만 그 의도가 제품에 닿는 마지막 한 뼘을, 이제는 기계가 대신 걷습니다. 그 한 뼘을 설계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화면을 아름답게 다듬어도 새로운 사용자는 우리 제품을 그냥 지나칠 것입니다. 여러분의 페르소나 보드에는 지금 누가 앉아 있나요. 거기 사람만 있다면, 한 자리를 더 마련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참고 자료
- Gartner, “Predicts 2026: AI Agents, MCP and Governance” — 2028년 API 소비 주체 및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에이전트 내장 전망 (2025)
- James J. Gibson, 『The Ecological Approach to Visual Perception』 (1979) — 어포던스 이론
- Donald A. Norman,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 (1988)
- Clayton M. Christensen, “Jobs to be Done” / 『혁신기업의 딜레마』
- John Maeda, “Design in Tech Report 2026: From UX to AX” (2026)
- Anthropic, “Model Context Protoco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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